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상태에 빠졌습니다.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에 대한 세계 열강의 반응은 냉담했으며, 그중에서도 고종 황제가 가장 믿었던 미국은 가장 먼저 등을 돌렸습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에서 “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는 조선이 자발적으로 보호통치를 수락했다고 워싱턴에 알렸고, 미국은 이를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일본의 주장을 정당화했다”고 증언합니다. 이어 미국은 즉시 주한공사관을 철수하고, 조선과의 외교 업무를 일본을 통해 처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고종은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한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를 근거로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제1조는 어느 한쪽이 제3국으로부터 압박을 받을 경우 다른 쪽이 중재에 나서야 한다고 명시했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고종의 친서를 접수한 채 읽지도 않고 방치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신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미국 선교사 중에서도 다수가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며 일제의 강압에 침묵했지만, 호머 헐버트와 같은 선교사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중 또 다른 감사의 대상인 인물은 엘머 케이블(Elmer M. Cable) 선교사입니다. 그는 1874년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나 1899년 젊은 나이에 한국에 온 후 배재학당 교수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여러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 활동을 펼쳤습니다.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은 대개 자국의 교세 확장을 우선시하면서 제국주의의 침략 행위를 외면했지만, 케이블은 달랐습니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에도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한국인의 고통에 깊은 연민을 느꼈습니다. 전재홍의 논문에 따르면, 케이블은 일본군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이를 상세히 기록했으며, 그의 연례 보고서에는 “일본군이 총검으로 희생자들을 찔렀다”는 참혹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케이블 선교사는 교세 확장의 중요성을 잘 알았지만, 일제의 폭력과 불의를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협성신학교에서 교수와 교감을 역임하며 일제강점기를 견뎠고, 결국 1940년 일제의 서양 선교사 추방 조치로 한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돌아볼 때, 엘머 케이블과 같은 선교사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억하며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비록 그들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대한제국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이방인의 도움과 연대 덕분이었습니다.